안녕하세요,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 아메리카노를 진행하고 있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송인근입니다.
지난 13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펜실배니아주 버틀러 유세 현장에서 연단에 올라 연설하던 중 총에 맞았습니다. 현장에서 사살된 범인이 쏜 총알은 귀를 스치며 지나갔고, 트럼프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강인한 불사조의 아우라를 장착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모두의 관심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충격적인 사건이자, 뉴스의 중심축을 바꿔놓은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제게는 프린스턴에 돌아가면 부지런히 글을 쓰려고 준비해 놓았던 소재와 주제를 싹 포맷해 버린, 그래서 다소 황망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미국 정치야말로 “정치 드라마 뭣 하러 봐? 뉴스가 더 드라마틱한데?”라는 클리셰가 딱 들어맞는 상황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트럼프의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가운데 그제(15일) 나흘 일정의 공화당 전당대회가 시작됐습니다. 첫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침내 발표된 2024년 트럼프의 러닝메이트입니다.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인 J.D. 밴스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간택됐습니다. 오직 트럼프의 입맛에 맞춰 고른 러닝메이트니, “간택”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다뤄야 할 뉴스가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제게 딱 알맞은 주제입니다.
트럼프가 왜 밴스를 골랐는지, 그리고 저와 짝꿍 유혜영 교수는 왜 트럼프의 결정을 예측하는 데 실패했는지, 그게 (어쩌면 민주당이 돌리는 행복회로일지 몰라도) 본선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지, 그와 상관없이 트럼프가 내다보는, 혹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있는 ‘큰그림’은 무엇일지 저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써봤습니다.
비장한 음악이 흐른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마르코 루비오 의원의 측근 한 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루비오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귀띔한다. 초조함으로 가득하던 루비오의 낯빛도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하늘이 이랬던가? 루비오는 쓰고 있던 MAGA 모자를 벗더니 짙은 한숨과 함께 모자를 꾸깃꾸깃 접는다.
“갈 때 가더라도 모자 정도는 괜찮잖아?”
지난 몇 달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하아… 주소도 옮기려고 서류 준비까지 다 해뒀는데… 칫!’
겉으론 태연한 척해야지. 침착하자 마르코.
“내일이 전당대회 날인가? J.D.한테 축하한다 전해줘라. 짜식, 출세했네!”
영화 <신세계> 이중구(박성웅 배우)의 마지막 장면 속 대사를 내 멋대로 패러디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밴스가 지명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플로리다)을 저 장면에 대입해 떠올렸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경쟁이 삼파전으로 좁혀졌단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루비오 의원을, 아내는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를 꼽았다. 그러나 트럼프의 선택은 셋 중에 가장 어린 J.D. 밴스였다.
밴스는 39살에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가 됐다. (다음 달 2일에 40살이 된다.) 젊디젊다. 젊다 보니, 당연히 정치 경력이 짧은데, 트럼프의 ‘기적의 논리’를 거치면 짧은 경력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 된다. 부패한 정치권에 물들 틈이 없던 훌륭한 사람이 되니까.
1984년 생으로, 1964년 생인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보다도 스무 살 젊다. 대통령과 부통령 매치업에서 각각 “늙고 무능한 민주당 대 젊고 강인한 공화당”의 대결이 완성됐다. 물론 공화당의 묘사가 그렇다는 말이지만, 이번 주 정치 시간표는 엄연히 ‘공화당의 시간’이고, 지금 공화당은 트럼프의 정당이다. 이번 주 만큼은 트럼프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아무리 논리적인 반론을 펴봤자, 주목받기 어렵다.
J.D. 밴스는 누구인가
트럼프가 아주 뜻밖의 후보를 선택한 건 아니었으므로, 언론들은 J.D. 밴스의 이력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준비한 대로 내보냈다. 영상으로 정리한 건 월스트리트저널의 이 클립이 핵심을 잘 추렸다. 한국 언론이 쓴 기사 중에는 3년 전 경향신문이 쓴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베스트셀러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 저자는 왜 정치에 입문하면서 과거 트럼프를 맹렬히 비난한 자신의 행적을 지우려 애쓰는가 짚은 기사다. 이번에 트럼프의 선택을 받으면서 밴스의 참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할 수 있다. 기사를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사실 미국 정치인의 이력은 위키피디아만 봐도 꽤 충실히 훑을 수 있다. J.D. 밴스의 위키피디아 중에 중요한 부분을 추려봤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회고록
J.D. 밴스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이란 동네에서 태어났다. 애팔래치아산맥의 평범한 마을로 한때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쇠락한 러스트벨트에 속한 곳이자, 본인이 책 제목부터 줄곧 언급한 힐빌리(hillbilly)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밴스의 고향인 러스트벨트 유권자들은 2016년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일등 공신이자, 밴스를 트럼프의 러닝메이트로 만들어준 귀인이기도 하다.
(힐빌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촌뜨기’라고 나오는데,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도시와 대비해 농촌을 먼저 떠올리는 한국 정서에는 쇠락한 제조업 중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촌뜨기라고 부르는 게 좀 와닿지 않는 면이 있다.)
밴스의 풀 네임은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James David Vance)로, 이름과 가운데 이름의 약자를 따서 J.D.로 불린다. 한국은 김, 이, 박, 최를 더하면 전체 국민의 절반에 육박할 만큼 성이 다양하지 않고, 대신 이름이 다양한 편이다. 미국은 반대로 성은 철자까지 따지면 무척 다양한데, 이름들이 뭐랄까, 대부분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로 거기서 거기다. 한 반에 김 씨가 여러 명 있는 것처럼 데이비드나 에밀리가 여러 명 있는 느낌? 그래서 자기를 어떻게 불러달라고 본인이 정하는데, 밴스는 J.D.로 정한 모양이다.
사실 밴스는 아빠의 성이 아니라 엄마의, 즉 외할아버지의 성이다. 태어날 때 성은 생물학적 아버지인 보먼(Bowman)이었다. J.D.가 걸음마를 뗄 때쯤 부모가 이혼했고, J.D.는 다섯 살 위 누나 린지와 함께 새아버지 밑에서 지냈다. 엄마는 약물 중독에 걸핏하면 아이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J.D.의 어린 시절은 말그대로 불우했다. 결국 J.D.는 누나 린지와 함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손에서 컸다. J.D.의 삶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굶주림, 학대, 엄마의 약물 중독으로 잔뜩 일그러졌는데,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에 잘 묘사돼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J.D.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2005년에는 6개월간 이라크에 파병돼 전쟁 특파원(combat correspondent)으로 전장을 누볐으며, 이후에도 공훈병으로 일했다. 미국에 돌아와 전역한 뒤 오하이오 주립대에 입학한 J.D.는 2009년 정치학과 철학을 복수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했고, 곧바로 예일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한다. 학생들이 운영, 발간하는 법률 저널인 예일 로 저널의 편집인을 지내는 등 법대 생활도 잘했고, 2013년에 법무 박사(또 다른 J.D., Juris Doctor)를 받고 졸업한다. 예일대 로스쿨에서 만난 지도교수 중 한 명이 아시아식 육아법 “타이거맘” 열풍을 불렀던 에이미 추아 교수였는데, 추아 교수는 J.D.의 인생 스토리를 듣고는 회고록을 써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고 한다. 2014년에 로스쿨에서 만난 배우자 우샤(Usha)와 결혼하면서 성을 정식으로 외할아버지의 성인 밴스로 바꿨다.
졸업 후 법원의 로 클럭을 거쳐 로펌에서도 일한 J.D.는 2016년부터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테크 업계의 벤처캐피털 회사에서 일한다. 이때 페이팔의 공동창립자이자, 유명한 VC인 피터 티엘이 세운 투자회사 미트릴 캐피털에서 일하기도 했다. 2016년은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가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마침 같은 해에 도널드 트럼프가 J.D.의 고향인 러스트 벨트 지역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J.D. 밴스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언론은 트럼프의 당선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책으로 주저 없이 “힐빌리의 노래”를 꼽았다.
선거, 이념, 정책
“I’m a Never-Trump guy, I never liked him. (저는 트럼프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한 번도 트럼프를 좋게 본 적이 없어요.)”
2016년 “힐빌리의 노래”는 트럼프의 당선을 예견한 예언서 대접을 받으며, 많은 주목을 받는다. 자연히 J.D. 밴스의 견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질문을 받을 때마다 J.D.는 트럼프를 아주 단호한 어조로 비판하고, 배격했다. 어쩌다 보니 자신이 대변하게 된 중서부 공업 지대의 백인, 서민, 노동자 계층을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을 뿐이라며, “트럼프는 미국의 히틀러”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집권 초반에도 트럼프가 펴는 정책이 실제로 미국의 서민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과 지적을 멈추지 않았다.
트럼프는 집권 4년과 2020년 대선 결과 불복으로 촉발된 1월 6일 의사당 테러, 이후 잇단 기소를 거치며 점점 공화당 내의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갔고, 공화당은 점점 더 트럼프의 사당으로 변했다. 2021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에 출마를 결심한 밴스의 눈에도 트럼프에게 잘 보이지 않는 한 공화당 안에서 미래는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 보였으리라. 실은 몇 년 전부터 밴스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고, 선거에 출마한 뒤부터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트럼프를 격정적으로 대변하는 트비어천가를 목이 쉬도록 불러댔다.
과거에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대신 밴스는 언론을 탓했다. 처음에 언론에 비친 트럼프의 모습만 보고 자신이 잘못 판단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트럼프는 진짜 미국인을 위해 필요한 정책들을 용감하게 펼쳐 온 시대의 영웅이자, 자신의 이념적, 정책적 이상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다. 트비어천가는 먹혔다. 밴스는 2022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지지를 받고 후보가 되는 데 성공했고, 이미 레드 스테이트로 기울어진 오하이오주에서 민주당 후보 팀 라이언을 53% : 47%로 꺾고, 38살의 나이에 상원에 입성한다.
“나도 알아요. 한때는 그(밴스)가 나에 대해 안 좋은 말 하고 뒤에서 욕하고 다닌 거. 근데 그때는 얘가 나를 몰랐을 때 얘기잖아요? 나를 알고 나서는 완전 나한테 푹 빠진 것 좀 봐요!”
트럼프가 J.D. 밴스를 두고 한 말이다. 자신을 향한 비판을 참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가 어떻게 자신을 히틀러라고 불렀던 사람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걸까? 트럼프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는 어렵지만, 트럼프가 가장 혐오하는 건 (마이크 펜스 같은) 배신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이길 수 있던 선거를 내 편인 줄 알았던 부통령이 망쳐버리는 바람에 지난 몇 년간 박해받으며 고생을 했으니, 이번에는 무엇보다도 내게 충성할 수 있는 놈을 찾자고 생각했을 거다. 똑같이 자신을 향해 날을 세웠던 사람이라도 자기를 모르고 허투루 말을 내뱉은 새파란 정치 신인 밴스는 용서하고 품을 수 있다. 반대로 2016년 경선 때 정치 신인이던 자신을 기득권의 언어로 조롱하던 마르코 루비오의 썩소는 쉬이 잊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보완재” 아닌 “후계자”? 트럼프의 셈법은?
밴스는 이념이나 정책에 있어서 분야에 따라 트럼프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인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게 임신중절권이다. 최근 들어 산모의 목숨이 위험한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한때 밴스는 강간, 근친상간 등으로 임신한 경우에도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선택권을 산모한테 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정부가 역할을 늘리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외교에 있어서는 미국의 고립주의를 강력히 지지한다.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의 성향을 어떻게 맞춰 팀을 이루는 게 제일 나은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다. 실제로도 케바케다. 그래도 대통령 후보가 갖추지 못한 특장점이나 대통령 후보가 쉬이 어필하지 못하는 유권자층에 인기가 많은, 그래서 팀으로 나서면 표를 좀 더 받을 수 있는 후보를 고르는 편이 낫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라티노 유권자(루비오)나 흑인 유권자(팀 스캇), 혹은 친기업 정책을 중시하는 유권자(더그 버검)에게 강점이 있는 후보들을 마다하고, 가장 “리틀 트럼프”에 가까운 보수 포퓰리즘의 샛별을 낙점했다. (물론 트럼프가 물고 태어난 금수저 대신 흙수저로 태어나 예일 로스쿨까지 나온 밴스가 훨씬 더 똑똑해 보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매력을 장착해 최대한 많은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대신 자신의 강점을 더 날카롭게 벼리는 쪽을 택했다. 영어로 이를 “double down”이라고 부른다.
바이든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트럼프는 “총알도 피할 만큼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레토릭이 성립된 만큼 누구를 내세워도 이길 수 있는 선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트럼프가 끝까지 방심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겉으로는 부정선거로 승리를 빼앗겼다고 말하지만, 실은 4년 전에 자신이 바이든에게 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경합주인 러스트벨트의 푸른 장벽(blue wall, 민주당이 공화당의 붉은 파도가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내는 주들. 이번 선거에서는 펜실배니아(PA), 미시건(MI), 위스콘신(WI) 세 곳)을 무너뜨릴 카드로 밴스를 고른 게 아닐까? 라티노 유권자, 흑인 유권자 물론 중요하고, 여성에게서 너무 많은 표를 잃지 않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러나 결국 선거인단 제도에서 승패를 가를 “경합주 중의 경합주”는 중서부의 주들이고, 거기 사는 백인 노동자, 서민들의 표를 얻어 2016년의 승리 방정식을 재현하는 데는 “힐빌리의 노래”를 앞세워 “당신들의 애환과 설움을 잘 알고 있다”며 접근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
트럼프의 노림수가 적중한다면, J.D. 밴스 카드는 ‘신의 한 수’가 될 거다.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미국의 보통 유권자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밴스가 러닝메이트가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당대회에 온 한 유권자가 자신있게 한 말은 인상적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정치인은 평범한 미국 사람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인물이에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인 취급 받고, 남성이라고 캔슬당하고, 조롱받고 핍박받고 지워진 사람들을 존중해주고, 그런 사람들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사람이요. J.D. 밴스야 말로 정확히 그런 사람 아닌가요? 트럼프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