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 아메리카노를 진행하고 있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송인근입니다.
오늘은 “틱톡 금지법”에 관해 쓴 지난 편지에 사족으로 달려던 (저한테만 찾아온) 봄날의 불청객 꽃가루 알레르기 이야기와 미국에 지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꺼내 놓는 “미국에서 병원 갔던 썰”을 풀어보려 합니다. 다행히 저는 악명 높은 천조국 의료보험에 심하게 덴 적은 없지만, 화들짝 놀란 적은 몇 번 있습니다.
꽃가루 알레르기
뉴저지로 이사 와서 맞는 첫 번째 봄. 생각하기도 싫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꽃가루 알레르기. 건초열(hay fever)로도 불리는 이게 한 번 도지면 진짜 눈물 콧물, 재채기가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실제로 계속 콧물 범벅에 찌륵찌륵거리며 잔뜩 울상을 한 채 길을 걸으면, 화창한 날 벤치에 앉아 기분 좋게 햇볕 쬐던 사람도, 웃으며 길 가던 사람도 흠칫 놀라 나를 슬슬 피해 돌아간다. 그게 아닌데… 저기, 저 이상한 사람 아닌데요, 아무튼 재채기를 하도 많이 해대서 배에 평생 내겐 ‘가질 수 없는 너’였던 식스팩이 생길 정도다. 며칠 사이 야윈 널 달래고~
평생 알레르기라는 걸 모르고 살던 나는 2017년, 내쉬빌(Nashville, TN)에서 맞은 두 번째 봄에 꽃가루 알레르기를 처음 앓았다. 알레르기를 앓았다고 하는 게 맞나? 알레르기가 처음 도졌다. 첫 번째 봄에는 왜 알레르기가 있는 줄 몰랐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해 봄에 동생이 결혼해서 3월부터 5월까지 한국에 있었다. 아, 새삼 동생한테 고마워진다. 봄에 결혼해 줘서.
내쉬빌은 남부 테네시주에 있는데, 2월 말만 되면 벌써 포근해지고, 5월 중순까지도 아직 덥지 않다. 봄날이 오래 이어진다. 날씨만 생각하면 더없이 좋지만, 봄이 길다는 건 꽃이 각자 주기에 맞춰 필 여유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나무와 풀마다 꽃이 피는 시기, 즉 개화기가 조금씩 다른데, 봄이 긴 미국 남부 일대는 그래서 개화기도 길다. 하필이면 거기에 인구가 70만 명(인근 소도시 인구를 다 더하면 150만 명)에 이르는, 미국 기준에서는 매우 큰 도시가 떡하니 있다 보니, 테네시주의 주도인 내쉬빌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항원을 뜻하는 알레르겐의 수도(National allergen capital)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가지고 있다.
2017년 3월 어느 날로 기억한다. 아내는 멀쩡했는데, 나만 갑자기 눈물, 콧물에 재채기가 났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두드려 패는 느낌이 들 때까지 온갖 분비물에 재채기가 멎지 않았다. 부랴부랴 인터넷 찾아봤더니, 꽃가루 알레르기 같았다. 항히스타민제 성분이 든 약을 먹으라고 해서 약국 가서 약을 사다 먹었다. 처음엔 그것도 잘 듣지 않았다. 이 약 저 약 먹어본 끝에 간신히 맞는 약을 찾았다.
사실 약이 잘 들은 건지, 그냥 많이 먹다 보니 가까스로 진정된 건지, 아니면 비가 내려서 꽃가루가 덜 날린 건지 알 수 없다. 내 평생 봄비가 그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다. 아주 그냥 비가 쏟아져서 꽃이며 나무가 다 꺾여 떠내려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레르겐의 수도라는 별명을 어디서 알게 됐느냐, 미국 온 지 6년 만에 처음 해본 건강검진에서였다. 다행히 그때까지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가 없던 덕분에 미국에서 병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 친구들이 의료보험도 있으니, 주치의(primary care doctor)도 정하고, 매년 건강한 지 검사도 받을 겸 밴더빌트대학교 병원에 가보라고 추천해 줘서 약속을 잡고 갔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한국에서처럼 건강검진 하는 줄 알고, 금식 등 안내문이 없어서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의 건강검진
전날 밤 몇 시부터 금식하시라는 안내문이 오지 않은 덴 이유가 있었다. 금식이 필요한 검사 하자고 부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년, 적어도 2~3년에 한 번씩은 하는 위내시경 검사가 미국에선 아무나 할 수 있는 검사가 아니었다. 내시경은커녕 소변 검사도 없었고, 그 흔한 피도 안 뽑아줬다. 아니,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지? 뭘 검진한다는 거지?
대신 수련의(레지던트)로 보이는 젊다 못해 어린 의사 선생님과 한 시간 넘는 문진이 이어졌다. 처음엔 가볍게 몇 개 질문만 하고 가실 줄 알았는데, 진짜 밀도 높은 영어 회화 실전반 연습 같았다. 미국 병원에서 아프면 뭐라고 해야 할지, 건강 관련 단어나 표현을 스무 개는 배운 듯하다. 이것저것 묻고 답하는 내내 ‘그래서 피는 언제 뽑지?’ 생각밖에 없던 내게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그럼 이제 저는 환자분과 이야기한 걸 토대로 제가 어떻게 답했는지 교수님께 말씀드리러 가볼게요. 잠깐 기다리시면, 교수님이 오셔서 다시 정리해 주실 거예요.”
“네? 정리요? 뭘 정리하죠? 얘기밖에 안 했는데? 근데 어디 가신다고요? 피는 언제 뽑죠? 일단 피부터 뽑아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약간 당황한 내게 수련의는 더 놀란 듯한 눈치로 되물었다.
“피요? 피를 왜 뽑죠? 혈액 검사로 확인해야 할 거라도 있나요? 저한테 말해주신 바로는 혈액 검사가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데…”
서로 소소한 문화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그가 말한 교수님을 모시고 왔다.
“우리 00 선생이 환자분께 몇 가지 잘못 이야기한 게 있네요.”
‘그럼 그렇지, 이제 피를 뽑는 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뭘 몰랐나 보다.’
그러나 교수님이 바로 잡아주신 건 문진 내용이었다.
“통풍이 있다고 하셨죠? 급성 발작도 몇 번 왔었다고… 그런데 제 학생이 맥주는 안 좋지만, 와인은 괜찮다고 했다고요. 와인도 좋지 않아요. 술은 체내 수분 흡수를 방해해서 다 좋지 않아요. 꼭 마셔야 한다면, 맥주든 와인이든 조금만 드시고, 물 많이 마시면서 드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피를 뽑아 봐야 요산 수치도 잴 수 있지 않나요?”
“요산 수치를 알고 싶으세요? 아니면 정식으로 통풍 진단을 받고 싶으신 거예요? 그럼 류마티스 내과 전문의와 따로 약속을 잡으시면 돼요.”
“아, 건강검진에서 직접 해주시는 게 아니고요?”
“네, 저희는 오늘 환자분 건강이 전반적으로 어떤지 확인하는 거예요.”
정말 ‘확인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금식할 생각을 왜 했을까?
알레르기에 관해서도 물어봤다.
“꽃가루 알레르기는요? 어떻게 방법이 없나요?”
“아, 내쉬빌이 봄에 개화기가 길어서 알레르기로 고생하시는 분 많아요. 여기 이사 오신 지 얼마 안 되신 거죠? 그럼 알레르기 증상 있을 때 어떻게 하세요?”
“약국 진열대에서 파는 약 먹으면 나아져요.”
“그럼, 계속 그 약 드시면 돼요. 알레르기는 딱히 치료법이라는 게 마땅치 않아서…”
“그런데 알레르기 항원이 뭔지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정확히 알아야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꽃가루가 맞지 않을까요? 검사가 있긴 한데, 알레르겐 종류도 수백 가지고, 그 가운데 어떤 게 문제인지 찾는다 해도 자연에 있는 알레르겐을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검사 비용이 너무 비싸요.”
“보험 처리가 안 되나요?”
“글쎄요, 확인해 봐야겠지만, 알레르기 반응으로 생명에 지장이 있거나 의료적 응급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보험사에서 검사비를 안 대줄 거예요.”
“그렇군요.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니까요. 검사비가 얼마죠?”
“대략 1,500~2,000달러 정도 할 겁니다.”
“... 없던 일로 하시죠. 약 잘 먹고 버티겠습니다.”
대략 이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 건강검진은 끝났다. 그 뒤로는 한국 갈 때마다 꼬박꼬박 건강검진을 한다.
처음엔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지내고 겪어 보니,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꼭 후진적이라거나 나쁘다고만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알레르겐이 뭔지 정확히 안다고 다음엔 꽃가루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올해 7년 만에 된통 고생하고 있지 않나ㅠ 의료비가 워낙 비싸서 주눅도 들지만, 덕분에 과잉 진료는 있을 수가 없으니, 때론 효율적인 면도 있겠다.
그래도 나와 아내는 병원 문턱이 훨씬 낮은 한국 의료 시스템을 더 신뢰하고 더 좋아한다. 건강검진도 꾸준히 한국에 갈 때 받을 생각이다. 최근 의료계 파업으로 병원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 같은데, 모쪼록 슬기로운 해결책을 마련해 원만히 타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캠퍼스마다 울려 퍼진 反戰
사실 주말 편지에는 미국 캠퍼스를 휩쓸고 있는 반전 시위에 관해서 쓰고, 편지 내용을 대본 삼아 아메리카노 에피소드도 한 편 녹음/녹화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레르기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24시간 간다고 써 있는 항히스타민제의 약효가 그만큼 가지 않아 카메라 앞에 앉아 차분히 무언가를 설명할 힘이 없었다.
프린스턴대학교 캠퍼스에도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학생과 교수 등 학내 구성원들이 모여 캠프를 차렸다. 다행히 프린스턴에선 컬럼비아대학교처럼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는 일은 없었고, 사람들도 다들 평화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캠프의 모습을 간단히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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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관해선 내일이나 모레 알레르기가 잠잠해지는 대로 에피소드를 녹화할 생각이다. 이미 국내 언론에서도 이에 관해 자세히 짚은 기사, 영상이 많다. 아메리카노에서는 대학 총장을 겨냥한 청문회를 주도한 데 이어 각 대학 총장을 압박하고 있는 공화당 정치인들의 셈법, 그리고 세대에 따라 나타나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등에 관해 더 자세히 짚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