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 아메리카노를 진행하고 있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송인근입니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짝꿍 유혜영 교수와 새로운 아메리카노 에피소드를 녹음해서 팟캐스트로 올렸습니다! (영상은 열심히 편집 중입니다:) 에피소드를 녹음하고 짝꿍은 일정이 있어서 먼저 한국으로 갔습니다. 저는 프린스턴에 남아서 할 일이 있어서 이번 주는 저희 부부가 오랜만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반전시위 번외편으로 쓰겠다고 말씀드렸던 뉴욕타임스 데일리 인터뷰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글을 쓸까 하다가 오늘은 좀 가볍게, 어깨에 힘을 빼고 5월의 프린스턴을 스케치해보려 합니다.
한 달 반 동안 집을 비울 예정입니다. 그동안 프린스턴의 어떤 게 그리울지 생각해 봤는데, 의외로 이것저것 떠오르는 게 많아서 놀랐습니다. 몇십 년째 같은 집, 한 골목에서 사신 터줏대감들이 워낙 많은 동네라 저희는 신입 중의 신입인데, 시나브로 동네에 적응하면서 정이 들었나 봅니다.
추춘제 v. 춘추제
다들 아시겠지만, 미국은 한 해 학사 일정이 가을에 시작해서 늦봄 또는 여름 초입에 끝난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에 비유하면 시즌을 추춘제로 운영하는 셈이다. 그래서 보통 여름방학이 길다. 봄에 시작해서 겨울에 학년이 끝나는 춘추제를 따르며, 자연히 겨울방학이 긴 한국과는 반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물론 아니고, 뭐가 더 나은지 따지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환경에 맞춰서, 또는 그냥 하던 대로 제도가 굳어진 것일 테고, 각각 일장일단이 있겠다.
다만 졸업식을 할 때 날씨를 생각해 본다면 북반구 기준으로 아무래도 미국식이 낫다. 너무 추워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 보면 축하할 기분도 잘 나지 않는 한국의 2월에 비하면 미국의 5월은 대개 날씨가 정말 좋은 계절이다. 절로 축하할 기분이 난달까?
프린스턴대학교는 다음 주가 졸업식이다. 그런데 어쩌면 졸업식보다 더 큰 이벤트가 이번 주말에 있었으니, 바로 총동문회다. 아예 이번 주말이 “Alumni Reunion Weekend”다. 금요일부터 프린스턴을 상징하는 호랑이 색깔(주황과 검정)과 무늬를 새긴 유니폼을 맞춰 입은 졸업생, 동문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어 작고 조용한 동네가 복작복작했다.
프린스턴에는 이팅 클럽(eating club)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동아리와 사교 모임의 특징을 섞어 놓은 듯한 모임인데, 많은 학생, 동문이 이팅 클럽에 상당한 소속감을 느끼는 듯하다. 동문회 때도 이팅 클럽별로 꼭 따로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안부도 나눈다. 언젠가 프린스턴 졸업생에게 이팅 클럽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본부 뒤편 잔디밭에 반전 시위대가 있었는데, 학교 측의 요청으로 시위대는 약 열흘 전 텐트를 물렀다. 시위대는 규정에 따라 협조하지만, 요구사항은 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나는 동네 주민일 뿐이니, 동문회의 각종 이벤트에 참석할 수 없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번 주말 총동문회는 여러모로 성대한 축제이자, 특히 학교 측에는 아마도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다. 동문이 내는 기부금이 가장 많이 걷히는 것도 이때라고 한다. 프린스턴이 대도시가 아니다 보니, 졸업 후에는 대부분 여기를 떠나 다른 곳에서 일을 한다. 이렇게라도 정해놓고 다 같이 모이는 날이 아니면, 미국은 특히 땅덩이가 워낙 크고 넓어서 학교 다닐 때 친했던 친구와 선, 후배를 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주말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일찌감치 비행기표며 숙소를 예약해 놓고 각자 학창 시절 추억 속에 풍덩 빠지러들 온다.
오늘 25일(토)은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학번별로 줄지어 퍼레이드도 하고, 밤에는 불꽃놀이까지 하는 본행사 날이다. 나는 동문회 구경하려고 남아있는 건 아니라, 다른 용무를 보러 뉴욕에 다녀올 계획이다. 언젠가 여름방학에 어디 안 가고 프린스턴에 머물게 되면 총동문회도 더 가까이서 구경해보고 싶다.
꽃가루만 빼면 전부 다 그리울 거야
오늘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9개월 남짓 지냈을 뿐인데 벌써 정이 든 프린스턴에 관해 생각난 것들을 늘어놓아 본다. 생각만 해도 벌써 간질간질하고 괴로운 꽃가루만 빼면 좋은 기억밖에 없다. 그리 오래 집을 비우는 건 아니지만, 많이 그리울 거다.
꽃, 녹음, 새, 동물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꽃가루가 싫었던 거지, 꽃이 싫었던 건 아니다. 알레르기가 도지기 전엔 가든 스테이트라는 뉴저지주의 모토가 정말 큰 축복처럼 느껴졌다. 캠퍼스 안팎, 주변의 숲과 산책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냥 아무 골목이나 가봐도 철 따라 꽃이 피고 새순이 나더니 이내 잎이 우거졌다. 가끔 운동 삼아 살살 뛰면서 안 가본 루트로 가서 이 집에는 무슨 나무가 있나, 무슨 꽃이 피나 둘러보곤 했다. 며칠 전에 꽃봉오리가 한창 맺힌 데를 기억했다가 꽃이 피었나 확인하러 또 가보는 것도 설레는 일이었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던 여우의 마음이 이랬을까.
우리집에 온 친구들은 우리집 바로 옆 골목이 이 동네에서 왕벚꽃(여의도 윤중로나 워싱턴 D.C. 포토맥 강변에 피는 그 벚꽃)이 가장 흐드러지게 피는 길이라며 부러워했다. 정작 벚꽃이 만개한 짧은 며칠간 우리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었다. 돌아왔을 땐 이미 꽃이 많이 지고 잎이 난 뒤였다. 올해는 벚꽃의 하이라이트를 못 봤지만, 프린스턴에서 봄을 보낼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거다. 달력에 적어둬야겠다. “어디 가지 말 것!”이라고:) 혹 이 편지를 읽고 프린스턴에 우리 부부를 만나러 오실 친구분들이나 아메리카노 애청자분들이라면, 그리고 일정을 고를 수 있다면 4월 중순을 추천한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한 분들은 제외!
좋아하는 가수 김진호 씨의 노래 중에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라는 노래가 있다.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에 잠길 나이는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대신 프린스턴에 와서 새 소리를 들으며 멍때리는 취미가 생겼다. 음색도, 음역도, 아마 메시지도 그때그때 다른 것 같은 여러 새 소리를 듣다가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봤을 때 개똥지빠귀나 천주교 추기경들의 주교복인 선연한 빨간색을 띤 카디널스, 아니면 청새, 울새 등이 보이면 기분이 더 좋다. 아예 새 소리나 사진을 찍어 물어보면 어떤 새인지 알려주는 앱까지 깔아놓고 뒷마당에 앉아서 오늘은 어떤 새가 놀고 있나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왠지 20대 때는 절대 관심 없었을 것 같던 취미다.
숙면
프린스턴은 한적하고, 고즈넉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동네다. 특히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 살다 왔으니 그 차이는 더욱 선명하다. 나보다 밤에 잘 때 주변 소음에 몇 배 더 민감한 아내가 프린스턴에 와서 만족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잠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진 점이다.
이사한 지 얼마 안 지나 초가을에도 낮에는 덥다가 밤이 되면 선선해져서 창문을 열어놓고 잤는데,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뉴욕 아파트에 살 때 잠이 안 오던 날 억지로 유튜브에서 수면에 도움 되는 ASMR 틀어놓고 자다가 갑자기 광고가 나오는 바람에 중간에 깨서 울화통이 치밀던 날들이 생각났다.
자연이 가깝다는 건 사람이 붐비지 않고, 여유가 있으니 다들 서로 양보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는 뜻이다. 당연하지만 운전자들도 기본적으로 양보 운전을 한다.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미국에선 정말 드물게도 이 동네에선 아이들이 학교에 혼자서 간다는 점이다!
친구 신성미 작가의 책 “사랑한다면 스위스처럼”을 보면 성미네 동네 아이들은 심지어 네댓 살 유치원생들도 몇백 미터긴 해도 학교에 혼자 간다. 그 정도 경지는 아니지만, 프린스턴은 적어도 유럽의 안전한 동네에 명함을 내밀 수준은 된다는 뜻이다! 미국에선 스쿨버스에 태우거나 부모 또는 보호자가 직접 데려다주지 않으면 아동 학대죄로 경찰에 붙잡혀갈 수도 있는 동네가 많은 거로 안다. 프린스턴은 예외다. 친구네 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헬멧을 쓰고 혼자서 씩씩하게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간다. 한국에선 당연히 다들 그러지만, 미국에도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킥보드 타고 다니는 꼬마들도 있다. 다 자동차들이 (특히 등하교 시간에는) 천천히 다니니까 가능한 거다. 나도 자연히 더 주변을 신경 쓰며 운전하게 된다.
마당
태어나서 처음 뒷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됐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니 다른 집 마당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부부는 대만족이다. 무슨 꽃이 피는지도 모르던 나무에서 번갈아 예쁜 꽃이 피고 지는 게 경이로웠다. 우리가 떠나 있을 6~7월에는 어떤 모습을 선물해 줄지 궁금하다. 언젠가 집을 지키는 여름이 있을 텐데, 그때는 여름을 상징하는 꽃 장미를 잔뜩 심어놓으면 좋을 것 같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을 수 있는 그릴을 아직 못 샀는데, 여름에 돌아오고 나면 미국 독립기념일 지나 세일을 할 수 있으니, 가성비 좋은 녀석으로 하나 장만해야겠다.
친구
친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새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그 자체로 약간 어폐가 있긴 하다. 그래도 새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새로 인연을 맺고 마음 맞는 사람을 사귀고 어울리게 된다.
프린스턴에서도 그랬다. 주로 아내의 동료나 동료의 가족과 친구가 되는데, 지난 일 년 사이에도 꽤 많은 사람을 새로 만나고 그중에 친해진 이들도 있다. 나이 들면 죽마고우 같은 친구는 사귀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절반 정도만 동의한다. 가끔은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을 만큼 죽이 잘 맞는 친구도 있더라.


일요일 밤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아메리카노 업로드는 좀 뜸해질 수 있겠지만, 대신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는 부지런히 써보려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쓰는 글이겠지만, 계속 미국 뉴스도 열심히 읽고, 듣고 업데이트하며 쓰는 글일 테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연출샷 아닙니다…잠깐 날씨가 더웠던 4월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