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 아메리카노를 진행하고 있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송인근입니다.
코펜하겐에서 학회 일정을 마치고, 저와 짝꿍 유혜영 교수는 이탈리아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휴가라 해도 저희는 휴양지에서 늘어지게 쉬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사람 사는 복작복작한 데를 부지런히 쏘다니며 사람들이 뭘 먹고 마시며, 뭘 하고 지내는지 구경하는 게 저희의 휴가 방식입니다.
7월에는 저희 부부의 기념일이 있기도 하고, 이탈리아에는 짝꿍이 좋아하는 와인과 제가 좋아하는 축구(올해 유로에선 허망하게 탈락했지만-_-)가 있고, 둘 다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에 어딜 가든 지역마다, 마을마다 색다른 특징이 돋보여서 저희가 사랑하는 여행지 중 하나입니다. 언젠가 1년 정도 살아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중부 에밀리아-로마냐주에 있는 볼로냐에 있습니다. 볼로냐는 “붉은 도시”로 불립니다. 붉은 벽돌 건물이 많기도 하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곳이며, 지식인 인텔리겐치아가 많아서 그런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구도심 한가운데 있는 역사박물관에 갔더니, 올해가 이탈리아 전국 빨치산 협회 창립 80주년이란 화환이 떡하니 걸려 있더군요. 나치 독일과 파시즘에 맞서 격렬히 싸운 곳중 하나가 볼로냐였다고 합니다. 다분히 스쳐 가는 여행자의 겉핥기 감상이겠지만, 이탈리아의 광주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쓰려는 글은 이탈리아 여행기가 아니라, 휴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미국 민주당의 상황에 관한 내용입니다. 7월 공화당 전당대회가 끝나고, 8월이 지나야 슬슬 올해 대선과 미국 정치 전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대목도 그때부터라고 생각했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TV 토론에서 말 그대로 비상벨을 눌러버린 탓에 연일 뉴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아… ㅠ 일요일에 프린스턴에 돌아가는데, 다음 주부터는 더 자주,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바이든이 민주당 의원들한테 편지 보내서 흔들리지 말라고 했대. 난 어디 안 간다고…”
아내가 다급히 외친다. 유럽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밤 미국 프라임타임 방송 뉴스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시장에서 사 온 과일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씻고 나갈 준비를 하면서 틀어놓기엔 유튜브가 편하다.
지난달 말 TV 토론 이후로 바이든 대통령이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민주당 내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보시다시피 바이든의 건강을 향한 우려가 실제로 선거 결과를 판가름하는 데 중요한 경합주 여론조사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바이든은 요지부동이다.
ABC 간판 앵커 조지 스테파노풀로스와 진행한 단독 인터뷰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와의 1차 토론은 내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잘하지 못했지만, 후보에서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스테파노풀로스가 최대한 예의를 차리면서도 정말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체력과 정신적인 명민함을 다 갖췄다고 자신하는지 집요하게 되물었는데, 바이든은 그때마다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은 단호했지만, 목소리는 토론에 나선 날처럼 힘이 없었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주별로 돌아가며 치르는 예비선거가 이미 다 끝난 마당이다. 민주당 전당대회는 40일 앞으로 다가왔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할 경우 여당이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일치단결해 “4 More Years!”를 외치는 건 불문율이다. 이를 어겼을 땐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아주 엄격한 관행이기에 민주당 주요 인사 가운데 섣불리 나서는 이는 잘 없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거다.
직접 방울을 달지는 못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언론들만 연일 수위를 높여가며 바이든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한 차례 더 사설을 실었다. “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명백한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제목처럼 더는 나이 들어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보이는 바이든의 눈과 귀를 막지 말라는 경고였다. 실제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바이든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토론 당일은 컨디션이 나빴을 뿐 바이든은 4년 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바이든이 지금 어떻게 보이냐다. 유권자들이 불안해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라면, 그래서 바이든을 내세워선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수를 모색해야 한다는 거다.
빌 클린턴의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한 마디 “멍청아, 중요한 건 경제라니까! (It’s the economy, stupid!)”를 고안해 낸 민주당 선거 참모 출신 제임스 카빌도 칼럼을 썼다. 마치 “이 글은 성지글이 됩니다.”는 톤으로 쓴 칼럼의 첫 문단부터 카빌은 “바이든이 후보직을 사퇴하는 건 시간 문제”라며, “민주당 의원과 당원들이 바이든의 재선을 위해 똘똘 뭉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사퇴를 발표하고 새로운 후보를 찾는 편이 낫다.”고 썼다. 도입부는 흥미롭지만, 뒤에 그래서 어떻게 새로운 후보를 세울지 제안한 방식은 개인적으로 썩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이럴 바에는 나도 성지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든이 귀를 열고 말을 들어줄 핵심 참모들에게 가닿을 일 없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겠지만, 오지랖을 부려 조언을 남겨본다. 영어로 이런 걸 “unsolicited advice”라고 하는데,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니까.
윗머-샤피로 티켓
바이든이 과연 물러날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임기 4년이 트럼프의 임기 4년보다 미국인에게 더 도움이 되는 정부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4년 전에 트럼프를 꺾은 경험이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계시로 여기는 듯하다.
바이든에게 사퇴를 권유하거나 종용하기 어려운 민주당 중진들의 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TV 토론 이후 지지층이 동요하는 모습을 봤더라도, 이를 다시 만회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게다가 2016년 대권에 도전하려던 바이든 부통령을 말렸던 게 오바마를 비롯한 민주당의 중진, 원로들이었다. 이번엔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회를 줄 차례라며. 바이든으로서는 ‘그때 클린턴 카드를 냈다가 트럼프에게 졌고, 내가 4년 뒤에 트럼프를 꺾어 정권을 되찾아왔는데, 이제 와서 나를 다시 밀어내려 해?’라고 얼마든지 서운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는 일은 별개다. 심지어 바이든 행정부 1기의 성과도 별개의 문제여야 한다. 바이든이 재선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언론이나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바이든의 치적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바이든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유권자들의 정당한 우려를 일축한 채 선거에 나섰다가 트럼프의 재집권을 막지 못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노욕(老慾)의 상징으로 남을까 봐,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적마저 다 무너질까 봐 걱정해서 말을 보태는 거다.
노욕이란 말이 지나치다면, 심리학자 아담 그랜트는 바이든의 심리 상태를 “질 게 뻔한 싸움에 올인하는 집착(escalation of commitment to a losing course of action)”이라고 설명했다.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 ‘졌잘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인간은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보다 이미 내린 결정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는 데 대뇌를 쓴다. 처음부터 계획과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느니, 그냥 이 잘못된 계획으로 끝까지 가보자는 쪽을 택한다는 거다. 지금 바이든은 자기가 실제로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거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선거에서 졌을 때 미국과 전 세계가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가 “재선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의 4년”이라면 이는 정말 얘기가 달라진다. 민주당 참모들도 “바이든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선을 다해 보자”는 생각 말고, 선거에서 이길 생각을 해야 한다. 프로는 결과로 말해야지, 열심히 하는 건 소용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바이든이 사퇴할 뜻을 내비치지 않아 대안이 누가 있을지에 관한 논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데, 여기에 성지글을 써보겠노라 했으니, 민주당의 필승 카드를 과감히 적어보도록 하겠다.
바로 그레첸 윗머 미시건 주지사와 조시 샤피로 펜실배니아 주지사가 팀을 이뤄 트럼프에 맞서는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공학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 선거인단의 표를 집계하는 방식이 처음에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다분히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 민주당이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하기 위해 이겨야 하는 주는 중서부의 이른바 푸른 장벽(blue wall)으로 불리는 경합주 세 곳이다.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배니아. 여기를 이기면 또 다른 경합주 세 곳(애리조나, 네바다, 조지아)에서 져도 270:268로 민주당이 이긴다. 나머지 44개 주는 이변이 없는 한 민주당, 공화당이 원래 우세한 대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조시 샤피로는 그전에는 펜실배니아주 법무장관(검찰총장)을 지내다 2022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꺾고 주지사가 됐다. 당시 득표율이 56%로 공화당 후보보다 15%P를 더 받았다. 위에 사진을 올렸지만, 지금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이 7%P 뒤지고 있는 펜실배니아에서 2년 전에 낙승을 거뒀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은 펜실배니아를 50.01% 대 48.84%로 간신히 이겼다.)
그레첸 윗머도 치열한 경합주 미시건에서 넉넉한 마진으로 재선에 성공한 젊은 주지사다. (윗머는 1971년생, 샤피로는 1973년 생) 2022년 주지사 선거에서 54.5%를 얻어 공화당 후보를 12%P 차이로 따돌렸다. 2020년 대선 미시건주 선거에서 바이든은 트럼프를 50.62% 대 47.84%로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둘 중에 누가 대통령으로 나서느냐보다 둘이 팀을 이루는 게 중요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굳이 대통령, 부통령을 정해본다면 나는 윗머가 대통령으로 나서는 게 더 나은 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과 차이를 부각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 수 있는 중요한 이슈가 바로 임신중절권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도 자신이 임명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 것을 변호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데, 안타깝게도 바이든은 첫 번째 TV 토론에서 이 점을 공략하다가 갑자기 할 말을 까먹고 횡설수설했다. 트럼프의 공화당과 차이를 선명하게 보이려면 젊은 여성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내고, 푸른 장벽을 지킬 수 있는 카드를 내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윗머-샤피로 티켓이 답이다.
물론 바이든이 사퇴하고 새로 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윗머, 샤피로 티켓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을 패싱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해리스 부통령은 4년간 보여준 게 많지 않기도 하고, 인기가 높지 않으며, 무엇보다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상원의원 출신이다. 어차피 민주당이 이길 게 뻔한 주 후보를 냈다가 트럼프의 “잘난 척하는 도시 엘리트들의 위선” 공격에 노출되는 것보다 경합주의 표를 얻어올 후보를 내는 게 낫다. (같은 이유로 전국적인 인지도는 높지만,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좋은 카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개 전당대회가 열리면, 바이든을 제외한 모든 잠룡이 원점에서 경쟁을 펼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바이든이 후보에서 물러날 경우 지금껏 모은 막대한 선거자금을 해리스 부통령이 물려받는 게 당연해지는데, 그럴 경우 다른 후보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전당대회에서 확보한 대의원의 표도 바이든-해리스 티켓에 투표하겠다고 약속한 표이므로, 모든 걸 ‘원점’에서 시작하는 공개 전당대회를 열려면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제다. 참고할 만한 전례도 근 몇십 년간 없는 일이다. 트럼프가 다시 4년 집권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바이든 카드로 부딪혀보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불확실성 가득한 트럼프의 집권을 막는 걸 최우선 순위로 삼는다면, 민주당의 누구든 바이든에게 쉬지 않고 고언을 해야 한다.
오늘 호텔 아침식사 중 존이 “참모“가 뭐냐고 묻길래 새로운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가 나왔다는걸 알게됐네요. Buon viaggio in It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