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점. 책. 여름.
아메리카노 뉴스레터 6/14
14일 토요일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입니다. 이번 주말 미국에서는 두 가지 큰 행사가 예고돼 있습니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군에 지시해 벌이는 창군 250주년 군사 퍼레이드입니다. 미국에선 군대가 통수권자 앞에서 무기를 과시하고 열을 맞춰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잘 볼 수 없기에 이례적이라는 평이 나옵니다. 민주당과 언론은 “나랏돈으로 벌이는 대통령의 흥청망청 생일 파티”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이번 군사 퍼레이드에 최대 4,500만 달러의 예산을 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의 예산만 이렇고, 기타 행사 준비와 경호에 드는 돈까지 합하면 많게는 우리돈 1천억 원이 쓰일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No Kings Day” 시위입니다. 트럼프는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출해 권력을 위임한 사람이지 왕관을 쓰고 태어난 절대군주가 아니라는 뜻을 담아 “당신은 왕이 아니다”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주최 측은 원래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에 맞춰 전국적인 시위를 조직해 왔는데, 최근 대통령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민자 체포와 추방에 항의하는 시위를 진압한다며 무리해 주 방위군까지 투입하자, 여기에 대한 반대와 이민자와의 연대를 핵심 의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캘리포니아주의 알렉스 파딜라 연방 상원의원이 크리스티 노엠 국토안보부 장관의 이민자 체포와 시위대 진압 관련 기자회견에서 질문하려다 제지당하고 경호원과 몸싸움을 벌인 끝에 힘으로 제압당하고 수갑까지 채워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상) 노엠 장관은 “사전에 조율 없이 기자회견장에 난입한 게 그럼 잘 한 일이냐”고 따졌고, 파딜라 의원은 “미국 연방 상원의원의 질문마저 이렇게 막아서는 정부가 미국 시민들을 어떻게 대할지 심히 우려스럽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체포와 이에 대한 반대 시위 이야기는 주말 시위 상황과 합쳐서 다음 주에 글을 한 편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4주 남짓 짧은 한국 일정을 마치고 다음 주에 유럽으로 갑니다. 오늘은 서울에 머문 단상을 여기서 접한 책들과 엮어 풀어보려 합니다. 프린스턴 가져가서 읽으면 좋을 책들 추천해 주시는 것도 물론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특히 영어로 책 읽는 게 여전히 고역인 제게는요…)
빛과 실
어쩌다 보니 명맥이 간당간당한 아메리카노 부속 인터뷰쇼 “송인근의 대항해시대” 두 번째 인터뷰 주인공이던 스위스 사는 신성미 작가는 사실 나와 짝꿍 유혜영 교수의 대학 시절 절친이다. 유럽에 갈 때마다 일정이 맞으면 스위스 성미 집에 놀러 가는데, 올해도 여름 여행의 대미를 스위스에서 장식하게 됐다. 그런데 한국 온 지 며칠 뒤에 성미한테 카톡이 왔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한강 작가의 신작 에세이 모음집 “빛과 실”을 종이책으로 읽고 싶은데, 가방에 자리 있으면 한 권 가져다줄 수 있니? 얇은 책이라 너희 비행기에서, 여행 중에 금방 읽을 수 있을 거야. 혹시 읽고 나서 스위스에 두고 갈 수 있을까? 내가 너희 머무는 한국 주소로 배송할게!
나도 마침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넣어둔 책이었다. 이튿날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책을 사서 친구 만나러 가는 길에 첫 번째 글을 읽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이었다. 작가의 나지막하고 여린 목소리로 사랑과 인간의 폭력, 또 치유를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와 그 내용을 활자로 적은 걸 ‘읽을 때’ 느낌은 또 달랐다.
그날 점심 약속 때 만나는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빛과 실”을 한 권 더 샀다. 그리고 아메리카노 팟캐스트에서도 몇 번 언급했고, 인스타그램에도 가끔 책 읽는 티 내고 싶을 때 올리는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의 얇은 책 “On Tyranny”도 한 권 샀다. 이것도 친구에게 선물해 주려고. “폭정”이란 제목으로 책이 번역돼 있지만, 책이 두껍지도 않고 나도 읽었으니, 이 정도 영어는 누구든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원서를 선물했다.
어떤 동사의 멸종
며칠 뒤 여름에 머물며 내가 읽을 책을 따로 사러 혼자 서점에 또 갔다. 진열해 둔 책을 둘러보고 고를 참이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정가에서 10% 할인되지만, 그래도 서점에서 시간 보내는 건 매력 있는 일이다. 누군가 대략 “책 속에서 길을 잃는 건 위대한 여행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아닌가? 방향감각이 엉망인 길치라서 서점에서 도서 위치를 검색해 프린트해 놓고도 못 찾아가서 직원들 도움을 받기 일쑤인 나는 아무튼 책을 꼭 안 사도 가끔 가는 서점을 좋아한다.
이번에 고른 책은 한승태 작가의 새로운 노동 에세이 “어떤 동사의 멸종”. 이전 책 “고기로 태어나서”를 정말 감명 깊게 읽은 터라 큰 망설임 없이 작가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집어 들었다. 반쯤 읽었는데, 이번에도, 아니 이번에는 더욱 ‘나도 글을 이렇게 쓰고 싶다!’는 부러움과 시샘 섞인 마음이 휘몰아친다. 양계장이나 양돈장 등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고기를 만드는 노동 과정보다 콜센터, 택배 물류 센터 등에서 노동하며 겪은 일을 풀어 쓴 이번 책이 어딘가 일상에 더 가깝게 느껴졌달까.
작가의 개그 코드도 나랑 잘 맞는다. 낄낄대며 읽게 되는 구절도 있고, 예상치 못한 드립에 ‘풉!’ 웃음이 터지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마다 매일매일 치열하게 사는 우리의 일상이 숭고하게 다가오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같이 사면서 “모파상 단편선”도 같이 샀다. 여기엔 사실 좀 웃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지난달에 미국에서 대학교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도 짝꿍과 다 같이 아는 사이다.) 짝꿍이 이 친구한테 내가 몇 년째 프랑스어 공부를 하는데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 프랑스어 실력은 몇 년째, 어쩌면 영원히(?) 정체된 게 맞다. 하지만 정말 걱정이 돼서 꺼낸 말은 아니고, 그냥 가볍게 웃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원래 진지하고 심성이 워낙 착해서 그 말을 듣고 난 뒤로 계속 (괜찮은데ㅠ) 내 늘지 않는 프랑스어를 걱정해 주더니, 갑자기 자기 방에 가서는 (친구 집에 놀러 갔었다) 프랑스어 책 한 권을 꺼내 와 내 손에 꼭 쥐여줬다. 모파상의 책이었다.
인근아, 내가 시댁 식구들하고 프랑스어로 대화하려고 공부할 때 프랑스어로 쓴 짧은 소설이나 글 읽는 게 도움이 정말 많이 됐거든. 이 책 가져가서 읽어.
친구는 프랑스 사람과 결혼해 산 지 벌써 몇 년 됐다. 당연히 프랑스어를 잘한다. 나를 이렇게 높이 평가해 주다니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무슨 수로 원서를 읽겠는가. 프랑스 어린이들 읽는 그림 동화책도 사전 찾아가며 한 페이지 넘기는 데 10분씩 걸리는데…
아무튼 그래서 모파상 단편선(Contes Choisis de Guy de Maupassant)이 보이길래 한 권 샀다. ‘컨닝용 답지’로 쓸 요량이다. 단편을 뜻하는 ‘꽁트’가 프랑스어에서 온 말이구나, 저 표지를 보고 알았다.
‘혜영스 초이스’
짝꿍은 나보다 한글은 약 다섯 배, 영어는 약 열 배 정도 빨리 읽는다. 처음에 짝꿍과 연애할 때는 빨리 읽기만 하지 대충 훑어서 읽느라 내용을 술술 흘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보다 맥락도, 디테일도 더 잘 챙긴다. 아무튼 책 좋아하는 짝꿍에게 삼청동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보낸 시간은 올여름 한국에서 머문 나날 중 단연 하이라이트였을 거다.
역사학자 폴 사빈이 쓴 “퍼블릭 시티즌스”는 짝꿍이 5월부터 자기 전에 틈틈이 읽기 시작해 한국 오는 비행기에서 끝낸 책이다. 미국 사람들이 왜 ‘큰 정부’를 끔찍이 싫어하는지 정말 재밌게 풀어낸 책이라고 극찬했다. 읽어보고 싶긴 한데, 번역본을 기다리는 게 빠를 것 같다. “식물적 낙관”은 친구가 선물해 준 책이고, “Hearings on the Hill”은 유혜영 교수가 연구들을 모으고 발전시켜 펴낸 (영어로 쓴) 첫 책이다. (책 홍보하려고 슬쩍 끼워둔 거 아니라, 정말 저기 있었다.)
스티븐 레비츠키의 책 두 권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국내에서 이슈가 됐었는데, 우리도 내용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의견을 낼 일이 생기면 정확히 알고 비판하자는 마음에 샀다. 넛지를 쓴 캐스 선스타인 교수의 책 “페이머스”는 재밌어 보여서 집었고, 사진 속 가장 두꺼운 책 케이스 자서전은 역시 지난달 또 다른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가 원서를 읽고 있었다. 저 두꺼운 책은 아무리 재밌어도 영어로 읽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번역본이 있길래 샀다. 가장 아래 있는 “서점의 시대”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트럼프 어게인
올해 서점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트럼프 현상을 분석한 책들은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못 보고 지나치기 어려운 명당 자리에 경쟁적으로 진열돼 있다. 책 종류도 엄청 많아서 트럼프 대통령이 보면 좋아할 거다. ‘역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군.’ 하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많은 책을 다 읽어볼 순 없지만, 그중에 저자께 직접 선물 받은 책 한 권은 소개하고 싶다. 선물 받아서 하는 소개인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지만, 사서 보기에도 아깝지 않은 통찰이 담긴 책이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통상전략혁신 허브를 맡고 있는 최병일 원장은 사실 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님일 때 알게 된 분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아직 “총장님”이라는 호칭이 입에 가장 잘 붙는데, 아무튼 통상 전문가이신 최병일 원장이 쓴 책이다.
전 세계가 관세 롤러코스터를 타는 중에 상호 관세를 유예한 90일이 다음 달 8일이면 만료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전략의 기원부터 중국과의 구조적인 경쟁 관계, 전망과 우리나라가 잡아야 할 기회까지 폭넓은 주제를 하나하나 깊이 있게 분석한 책이다. 평소에 통상 전문가로서 고민해 온 저자의 통찰이 잘 담긴, 준비된 책이다. (다른 트럼프 관련 책들이 다 급조한 책이라고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아무튼 당장 미국과의 관세 협상으로 첫 시험대에 오른 이재명 정부 관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책 고르는 책
번역서로는 레이나 립시츠가 쓴 “미국이 불타오른다”에 해제를 쓴 적이 있지만, 한글로 쓴 책에 추천사를 쓰는 영광을 누리게 해준 건 예스24의 손민규 MD다.
사실 민규와도 친한 친구 사이다. 신동훈 작곡가, 신성미 작가에 이어 대항해시대 세 번째 인터뷰이로 민규를 낙점하고 지난여름 촬영까지 마쳤었다. 그런데 녹화한 클립을 틀어보니, 매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끝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우리 둘이 서로 유튜브에 출연해주자고 품앗이 형식으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를 바꿔가며 촬영했었는데, 민규는 나와의 인터뷰를 과감히 올려뒀다. 고맙지만, 조회수를 보면 괜히 미안해진다.
아무튼 손민규 MD가 예스24에서 쌓은 내공을 원기옥처럼 모아 나한테 맞는 재밌는 책을 고르는 길잡이 책을 썼다. 제목도 직관적이다. “책 고르는 책.” 연초에 나오는 책에 맞춰 쓴 추천사라서 2025년 첫 책으로 추천했지만, 당연히 언제 읽어도 좋은 안내서다. 혹 일이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재미를 못 느껴서, 어떤 이유에서든 올해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그런데 벌써 1년이 반이나 지나가는 게 아쉬운 분들은 “책 고르는 책”부터 펼쳐놓고 내게 맞는 책을 찾아보시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 될 것이다.
민규와 만나서 원서로 읽느라 속도가 더디지만, 아를리 혹실드 교수의 “빼앗긴 자부심” 이야기를 해줬더니, 미국 사회를 들여다본 논픽션 수작 가운데 재밌게 읽은 책으로 “패트릭과 함께 읽기”를 추천해 줬다. 그리고 나를 미야베 미유키에 입문시켜준 누나가 이번에 만나서는 한국 SF 소설이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김보영 작가를 강추했다. 그래서 “진화 신화”도 주문했다.
원래 주문한 이튿날 새벽에 배송되는 게 과하다고 생각해 잘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혹 배송이 늦어지면 출국 전에 책을 못 받을까 봐 빨리 받아보는 옵션을 고를까 하다가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한승태 작가가 묘사한 택배 상하차 노동의 장면들이 떠올라 그냥 천천히 받아보기로 했다. 효율, 속도, 군더더기 없는 것들로 찬사를 받는 한국 사회지만, 뭐든지 빨리빨리, 깔끔하게 싹 정리되고 처리되는 한국 사회가 가끔은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비효율의 사랑
그 절반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책이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아닐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는 답을 알지 못한 채 모레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친구 최다은 PD가 펴낸 책 “비효율의 사랑”은 18일에 출고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책을 쓰다가 끝내 탈고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또 팟캐스트 필름클럽을 애정하는 클러버로서, 그냥 친구로서 다은이의 책이 나오길 고대했는데, 지금 주문해도 받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지만, 천천히 아껴뒀다 나중에 읽는 것도 매력적인 일이리라.







인근아 고맙다:) 남은 여정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길 바라!
필름클럽 처음부터 애청자인데, 편집장님과 친구라니.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올 여름 읽고 싶은 책들 목록이 풍성해 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