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벅찬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꺼내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강 작가는 2016년, <채식주의자>로 (책을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 씨와 함께)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사실 <채식주의자>를 읽고는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힘은 좋았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때로는 불편했다.
이른바 오역 논란으로도 꽤 시끄러웠던 거로 기억한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뉴스페퍼민트에 ‘문학 작품의 번역에 정답이 있을까?’란 고민을 담아 뉴요커 기사를 번역해 올리기도 했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런저런 아쉬움을 아마도 페이스북 담벼락에 끄적여 놓았더니,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형, 그러지 말고 <소년이 온다> 봐봐. 어쩜 형한테는 그 책이 더 맞을 것 같아.
그 길로 뉴욕 한인타운 고려서적에 가서 한국보다 훨씬 비싼 값을 주고 책을 사 왔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 내내 몸서리를 쳤다. 그러지 않고는 문장 하나하나를 삼키기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몸으로 오는 전율보다 몇십 배는 강력한 고통의 칼날이 심장을 괴롭게 후벼 팠다. 인간의 야만과 폭력이 불러온 있어서는 안 될 죽음, 산 자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죄책감과 고통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러면서 동시에 깊이 있게 묘사한 글을 또 볼 수 있을까? 5월 광주에는 딱 한 번 가봤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 못 가고 있다.
아무튼 친구 말이 꼭 맞았다. <소년이 온다>는 누군가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학 작품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장 추천할 소설이다. 그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어제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에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수상 소식을 짧게 전하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수상 이유로 “역사적인 고통을 직시하는 동시에 인간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꼽았다.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의 취약함을 드러냈다. 그의 글에는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을 잇는 고리를 짚어내고 묘사하는 특출한 능력이 있다. 시적이고 또 실험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한강은 현대 산문의 혁신가다.
예상대로 언론과 친구들의 소셜미디어에 감격에 젖은 축하의 말, 작품에 대한 감상들이 줄을 이었다. (나도 오늘 아니면 이 글은 못 쓸 것 같아서 쓰는 중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시집도 좋다는 친구 커플이 있어서 주문했고, 한림원이 소개한 작품을 정리한 기사를 보니, 제주 4.3 항쟁에 관한 이야기인 <작별하지 않는다>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집단적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설명을 읽고 보니, 한강 작가가 7년 전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도 생각난다.
당시 칼럼의 일부 표현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이에 관해 한강 작가는 기고문을 쓰기로 결심한 건 “한국에 구체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실감을 전하고 싶어서”였다며, “마치 한국에는 어떤 위기에도 무감각하고 둔감한 익명의 대중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국외 분위기가 염려스러웠다”고 전했다.
요즘도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외국인 친구들에게서 휴전 중인 한국에 사는 게 무섭지는 않은지, 여행하기에 안전한 거 맞는지 질문을 가끔 받는다. (예전에는 훨씬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이가 없고, 심지어 기분 나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 보면 당연히 이해가 안 갈 만도 하다. 사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현대사의 경험이 엄연히 다르니까.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픈 현대사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잊으려 발버둥 쳐 봤자 잊히지 않는 기억이니, 다들 마음 한구석에, 할 수 있다면 무의식 속에 넣어두고 살아간다. 그걸 매일 꺼내어 들여다보면, 너무 괴로워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할 거다. <소년이 온다>를 두고두고 꺼내 읽지 못하는 것처럼. 매일 언급하지 않는다고 문제를 잊은 건 아니다. 아픈 기억은 화해로 치유하고 평화가 찾아와야 비로소 진짜 잊히기 시작할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간절히 바란다. 한강 작가도 칼럼에서, 또 여러 작품에서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숫자로 보면 와닿지 않는 죽음
실은 어제 스브스프리미엄에 다음 칼럼을 번역하고 해설을 썼다. 쉽지 않은 번역이었지만, 정말 있는 힘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확히 문장 하나하나를 전하고 싶었던 글이다.
"내 아들딸이 언제든 소모품이 될 수 있다... 갈림길에 선 이 나라"
어느덧 하마스의 테러 공격 1주년이 지났다. 그 말은 곧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난 지도 1년이 더 지났다는 뜻이다. 1천 명 넘는 이스라엘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 하마스의 테러 공격이 발단이었지만, 가자지구에서는 1년 동안 4만 2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의 죽음이 신문 기사 속 숫자로 치환되는 것만큼 공허하고 잔인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죽음에 무관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는 칼럼 저자의 주장이 특히 울림이 있었다. (원문 제목은 “On Israeli Apathy”, “이스라엘의 무관심에 관하여”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저 글을 써서 보내놓고 자고 일어났는데,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고 해서 책장에 꽂혀 있던 <소년이 온다>를 꺼내 ‘밤의 눈동자’ 장을 읽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은 아니고, 그냥 책갈피가 거기 꽂혀 있었다.) 오랜만에 한강 작가의 문장을 읽고 나니, 그동안 무심하게 ‘Skip’ 버튼을 누르던 유튜브 광고를 도저히 지나치지 못하겠다. 가자지구 난민들이 간곡히 도움을 청하는 광고다. 누구의 죽음도 그냥 숫자 속에 흘려보낼 일이 없는 평화가 어서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일기에 끄적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또 허무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이런 생각도 하고, 한강 작가의 문장도 읽어볼 수 있어서 벅찬 하루였다.
덧 1.
그나저나, 번역에 워낙 관심이 많다 보니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과연 인공지능과 신경망 번역이 문학작품도 번역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마도 언어를 가장 고차원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문학일 텐데, 그래서 문학을 번역하는 데는 정답이 없는데, (적어도 꼭 떨어지지 않는데) 인공지능이 이것도 해낼 수 있을까? 자연과학 부문의 노벨상은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가 탔는데, 문학상은 인공지능이 어쩌면 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작품이 탔다. (한국어 문학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처음이니까) 좀 억지스럽지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덧 2.
현대사의 경험에 닮은 구석이 있다면 문학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소비하는 것도 비슷할까? 라틴아메리카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예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식민지. 근대화. 외세. 미국. 전쟁. 학살. 키워드만 봐도 한반도와 라틴아메리카는 직관적으로 공유할 만한 게 많다.
<소년이 온다>에서 쓰레기 더미처럼 쌓아놓은 시민들의 시신을 묘사한 장면을 읽을 때 1973년 칠레 국립경기장에서 피노체트 군부에 살해된 빅토르 하라와 산티아고 대학생들의 모습이 겹쳤다.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회(Asociación Madres de Plaza de Mayo) 회원들이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찾아보니 <소년이 온다>는 스페인어로도 번역이 됐다고 한다. 제목은 영어 제목을 옮긴 “Actos Humanos”. 부에노스아이레스 아테네오 서점에 갔을 때 외국 서적 코너에서 찾아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