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 아메리카노를 진행하고 있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송인근입니다.
첫 편지는 잘 받아보셨나요? 매번 어제처럼 길게 글을 쓸 수는 없겠죠. 제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모두 부족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언젠가 먼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가리라는 마음으로 꾸준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일기장은 일기장인데 남들이 봐도 되는 일기장이라는 생각으로요. 가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쓰다 보면, 적당히 가릴 건 가리고 꾸미고 보탤 때도 있겠지만, 가급적 솔직하게 제 주변의 이야기들을 써보겠습니다.
두 번째 편지는 지난 4월 8일 월요일에 북아메리카 대륙을 관통했던 일식(日蝕, solar eclipse)에 관한 단상 모음입니다.
일식(日蝕).
지난 8일은 달의 그림자가 해를 삼키는 날이었다. 아무데서나 일식을 볼 수 있던 건 아니다. 달의 그림자가 지구상의 어디를 훑고 가느냐에 달린,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다.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각도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일식을 볼 수 있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이 정해진다.
지구 곳곳에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지만 — 실제로 기후 위기를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 여전히 지구상에는 사람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훨씬 더 많다. 지구 표면의 2/3 이상은 바다다. 육지라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극지방은 추워서, 적도 근처는 더워서, 고산지대는 높아서 쉽게 못 간다. 점점 늘어가는 사막도 듄에 나오는 샤이 훌루드(모래 벌레)를 몰 줄 모르는 우리가 누비기 어려운 지역이다.
올해 일식은 북아메리카 대륙을 관통했다.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던 지역, 즉 해와 달이 지구에서 볼 때 겹쳐 보인 경로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에서 해가 떴고, 오전 멕시코에서 시작해 텍사스주를 지나 오후 내내 미국을 북동진해 가로질렀다. 이어 나이아가라 폭포, 버몬트, 메인주를 지나 미국을 빠져나갔고, 캐나다 동쪽 뉴펀들랜드를 지난 해는 대서양으로 졌다.
프린스턴은 안타깝게도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좀 비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펜실배니아주 서북단 혹은 뉴욕주 북부였는데, 차로 4~5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처음엔 ‘굳이 거길 뭣하러?’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올라오는 사진과 영상에 감복하고,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고 나니 ‘이 정도면 코앞에서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날릴 건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다음 개기일식을 미국에서 보려면 2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포모(FOMO)가 몰려왔다. 어리석고 게으른 내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나사(NASA)에서 정리한 21세기 앞 50년간 미국에서 일어날 일식 시기와 경로. 일식 일지를 정리한 ‘덕업일치’하신 분 이야기는 오늘 편지 뒤에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또 소올직히, 내가 언제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는 데 관심이 있었단 말인가.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이래저래 몸이 피곤했을 거다. 그렇다고 1박 2일을 쓰면, 특히 나보다 일정표를 서너 배 빼곡하게 채워 사는 유혜영 교수가 받을 정신적 피로가 어마어마할 거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과장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아무튼 개기일식을 보지 않은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일식을 보지 못한 데 대한 내 감정의 흐름을 돌이켜보면, 역시 인생은 정반합의 반복 아닌가 싶다.
El eclipse / 아우구스또 몬떼로쏘
미 항공우주국(NASA) 홈페이지에 가면 앞으로 몇십 년간 일식과 월식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검색 한 번이면 다 찾을 수 있으니 대단한 기밀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무슨 수로 해와 달의 움직임을 그토록 자세히, 정확히 그려내 천기를 인터넷에 누설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일식이 언제 일어날지 미리 아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온두라스 출신 소설가 아우구스또 몬떼로쏘가 쓴 “일식(El eclipse)”이란 소설이다. 사실 단편소설이라고 부르기도 뭣할 만큼 짧다. A4 용지 한 장이 채 안 되는, 달랑 일곱 문단에 실로 강력한 서사를 담았다.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를 접할 때마다 한국의 현대사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느끼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담긴 서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묘한 울림을 느낄 때가 있다. “일식”을 처음 읽었을 때가 그랬다. 대학교 때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사회 수업에서 유일하게 그 주에 다룰 소설을 다 읽어갔던 주가 “일식”을 다룬 주였다. 이 짧은 글을 가지고도 수업 시간이 모자랄 만큼 서로 감상평을 나눴던 때가 문득 그립다.
어쨌든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삼은 지구는 해와 달과 부대끼며 숨을 쉰다. 인류의 문화라는 것도 해와 달의 움직임에 당연히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어제는 파키스탄 친구랑 저녁을 먹었는데, 오늘만큼은 꼭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어제(10일)가 이드 알피트르라고 일러줬다. 한 달 동안 해가 떴을 때 금식하는 라마단은 이슬람력에 의해 정해지는데, 이슬람력도 우리네 음력처럼 달의 주기를 따라 날짜를 센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매해 아홉 번째 달이고, 열 번째 달의 첫날이 이드 알피트르다. 해가 뜬 동안 금식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며 가족, 이웃과 음식을 나눠 먹고 축제를 즐기는 명절이라고 한다.
일식은 음력으로 초하룻날에만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드 알피트르와 일식의 날짜가 이렇게 가까웠던 거다.
사진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 두 눈에 양보하세요.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에 “제가 읽고 듣고 보는 글, 책, 팟캐스트, 다큐멘터리”도 소개할 거라고 거창하게 써놓았는데, 오늘은 내가 가장 즐겨듣는 팟캐스트 뉴욕타임스 데일리에 나온 프레드 에스피낙(Fred Espenak)이란 분의 이야기 가운데 인상적인 말을 전하려 한다.
어릴 때부터 별 보고 하늘 보기를 좋아하던 에스피낙은 나사에 입사해 일식, 월식 일정 관련 아카이브를 총괄하는 일을 하게 됐다. 별명도 “Mr. Eclipse(일식의 사나이)”다. 이 글에 올린 사진 밑에 보면 동양화에 낙관처럼 에스피낙의 이름이 써 있는 걸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일식을 앞두고 에스피낙을 인터뷰했다. 어쩌다가 평생 일식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됐는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다 마지막에 진행자 마이클 바바로가 (개기)일식을 처음 보게 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묻자, 에스피낙은 뜻밖의 명언을 남겼다.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글쎄요, 제 생각에 사람들이 많이 하는 실수가 우리 삶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다 사진으로 찍고, 영상으로 남기고 저장하려는 집착 같아요. 점심을 뭐 먹었는지, 오늘 저녁 메뉴 그런 거 시시콜콜 다 찍어서 올리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잖아요? 일식은요, 다른 무엇보다 당신이 직접 두 눈으로 봐야만 해요. 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일식을 보기 좋은 데 자리를 잡고 기다리셨다가 멋진 순간을 꼭 직접 맨눈으로 보셔요.
의자에 앉아서 허리를 뒤로 젖히고 보든, 아예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보든 길어야 몇 분 이어질 마법 같은 순간을 온몸으로 겪어보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짧은 순간 눈에 담은 장면과 인상, 받았던 강렬한 느낌을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리고 되뇌는 거예요. 그렇게 기억에 담고, 마음에 새기는 거죠. 이 놀라운 경험에 굳이 카메라나 다른 기기가 끼어드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달이 해를 완전히 가리면, 그때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쓴 보호필름을 벗고 그냥 맨눈으로 하늘을 올려봐도 되거든요. 해가 가려지면 세상이 얼마나 어두워지는지 직접 보는 것도 신기할 거예요.”
그렇다. 모든 순간을 다 담으려는 집착이 오히려 두 눈으로 봐야만 느낄 수 있는 경이로운 경험을 가로막는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나? 가뜩이나 스마트폰에, 전자기기에 소셜미디어의 각종 추천 알고리듬에 붙들리고 휘둘려 살다 보니, 조금이라도 거기서 벗어난 나만의 시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그 생각에 꼭 들어맞는 조언이라서 (일식을 볼 것도 아니면서) 괜히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