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 아메리카노를 진행하고 있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송인근입니다.
어젯밤 미국 대선 후보 간의 첫 TV 토론이 있었습니다. 두 당이 전당대회를 마치고, 선거가 임박한 9월이나 10월에 TV 토론을 몰아서 하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바이든과 트럼프 양측이 6월에 한 번, 9월에 한 번 토론하기로 전격적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렇게 열린 이례적인 6월 TV 토론.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훨씬 잘했다는, 혹은 바이든이 트럼프보다 훨씬 더 못 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입니다.
자세한 토론 총평 이야기는 내일 녹음/녹화해 올려드릴 아메리카노2024 에피소드를 참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에서는 어젯밤 토론 이후 갑자기 전혀 터무니없지 않은,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나리오가 돼 버린 ‘(바이든) 후보 교체론’의 실현 가능성, 타당성을 검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토론의 승패를 두고는 이견이 거의 없을 것 같다. 대체로 민주당과 바이든에 호의적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들의 평가만 봐도 어제 토론의 분위기를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거다.
어제 토론에선 트럼프가 훨씬 더 대통령직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바이든은 그러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따져보면 트럼프는 여전히 트럼프다웠다. 입만 열면 거짓말에 자기 잘못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한테 불리한 내용은 빙빙 둘러 가며 언급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우리가 잘 아는 트럼프는 어디 가지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가 쉴 새 없이 쏟아낸 거짓말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따지며, 차이를 부각했어야 할 바이든이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트럼프도 이를 파악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예견했는지 바이든이 말할 때 거의 끼어들지 않고 지켜봤다. 트럼프가 그렇게 차분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싶다. 가만히 있으면 바이든이 알아서 문장을 잇지 못하고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해 찡그리다가 웅얼웅얼 혼잣말하다가는 발언 시간이 다 소진되곤 했다. 한 번은 트럼프가 이렇게 말했다.
“방금 바이든 대통령이 뭐라고 했는지 저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바이든 대통령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평소 같으면 트럼프가 과도하게 비아냥대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만하지만, 이번엔 정말 그랬다. 나도 자막을 켜놓고 몇 번을 돌려봤지만,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한둘이 아니었다.
전당대회에서 후보 새로 추대할 수 있을까?
어제 토론 이후 바이든 말고 다른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내자는 주장은 하루아침에 민주당 안에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주장이 됐다. 바이든을 과연 설득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얘기이긴 한데, 오늘은 민주당이 어떻게든 바이든을 설득한다고 가정하고, 주별로 돌아가며 치르는 경선도 거의 다 끝난 마당에 전당대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새 후보를 추대할 수 있을지 짚어보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필진인 에즈라 클라인과 미셸 코틀, 로스 더우댓이 토론 이후 긴급히 모여 녹음한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주로 참고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셸 코틀과 로스 더우댓이 계속해서 “에즈라, 이제 진짜 네가 올해 초에 내다봤던 그 계획대로 가는 수밖에 없는 거잖아, 안 그래?”라고 하는데, 그 계획을 소개한 에즈라 클라인 쇼 에피소드는 이거다.
2월 21일에 올라온 에피소드로, 아직 슈퍼 화요일도 오기 전에 바이든 말고 다른 사람을 후보로 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가 에즈라 클라인이 특히 민주당 사람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험한 말도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전주에도 같은 주장을 했었다. (민주당 사람은 물론 아니고, 심지어 투표권도 없는 일개 관전자인 나조차 잔뜩 색안경을 끼고 본 탓에 저 에피소드를 조금 듣다 꺼버렸다. 괜한 바이든 흠집 내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클라인을 욕했던 사람들에게 저 에피소드는 뒤늦게 일종의 ‘성지글’이 됐다.)
생각해 보면 지금처럼 주를 돌며 유권자의 뜻을 모으는 예비선거를 하고, 그 뜻을 받드는 대의원이 주를 대표해 전당대회에 가서 투표를 하고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 방식이 수백 년 된 건 아니다. 아메리카노 유튜브 초창기에 올린 이 영상에서도 잠깐 설명했지만, 일반 당원의 뜻을 무시했다가 결과적으로 참패를 부른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가 계기가 돼 이후 바뀐 방식을 이제 약 50년 정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에즈라 클라인의 ‘제안’은 1968년 이전의 후보 추대 방식을 빌려오자는 거다. 예비선거가 구속력이 없던 시절의 방식을 비상사태인 만큼 이번 한 번만 되살리자는 거다. (사실 2월에 클라인의 주장을 바로 받아들였다면 바이든 말고 다른 후보들이 예비선거 과정부터 경쟁했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스스로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그러므로 대의원들에게 자신을 추대하지 말아 달라고 공개적으로 뜻을 밝히는 편이 가장 깔끔하다.
그럼 전당대회에 모인 대의원들은 모든 예비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원점에서 다시 후보를 찾는다. 새로 나선 후보들이 주장과 정견, 비전을 펼치고, 이를 토대로 대의원들이 투표를 해 11월 본선에서 트럼프와 맞설 후보를 세운다. 계획대로 잘만 된다면, 8월 민주당 전당대회는 치열한 토론의 장이자 선거의 정수라 부를 만한 무대가 될 수 있다.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부터 개빈 뉴섬(캘리포니아 주지사), 조시 샤피로(펜실배니아 주지사), 그레첸 윗머(미시건 주지사) 등 민주당의 잠룡들이 예정보다 4년 먼저 알을 깨고 나와 야심을 드러내고 경쟁을 벌일 것이다.
물론 이건 현역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새로 후보를 추대하는 (초유의 일까지는 아녀도) 낯선 길을 무사히 잘 헤쳐 나갔을 때나 가능한, 어쩌면 꿈 같은 시나리오다. 반세기 넘게 해본 적 없는 방식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사고도 날 테고, 자칫 난상 토론만 벌이다 당이 사분오열될 수도 있다. 요란하게 좌충우돌한 끝에 제대로 된 후보를 내지 못한다면, 민주당이 가장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말 것이다. 트럼프의 47대 대통령 취임이다. 그때 가서 ‘그냥 어쨌든 트럼프를 한 번 이겨본 바이든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 나았을까?’ 때늦은 후회를 하며 땅을 칠 가능성도 있다.
아직 토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미국 친구 여럿은 여전히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며칠 지나면 다시 바이든이 오랜만에 하는 첫 번째 토론이라 잘 못했을 뿐이라며, 계속 바이든 카드를 밀고 가자는 주장이 다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어제 토론을 보고 든 생각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을 때 이를 남겨둘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에즈라 클라인이 팟캐스트에서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토론을 보며 이런 메모를 끄적였다.
연두교서에서 에너지 넘치는 짱짱한 모습을 보인 게 불과 4개월 전인데, 그사이에 저렇게 나이 들어버린 건가. 정말 저 나이대엔 하루하루가 다른 걸까? ㅠ 그런 바이든이 4년 더 백악관에 있겠다고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게 과연 사람들에게 먹힐까?
어쩌면 이번 대선까지 남은 4개월 반은 유례없는 일로 가득한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잘 읽었습니다. 이 글 읽는 순간에 뉴욕타임스에서 바이든 교체 요구 사설을 봤습니다. 뉴욕타임스가 그런 사설을 쓰다니 충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