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 정권의 역린: 제프리 엡스틴 파일
아메리카노 뉴스레터 8/6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례를 찾기 어려운 결정의 연속입니다. 언젠가부터는 트럼프가 내린 결정이 미국 대통령, 행정부, 백악관이 그동안 했던 결정에 비춰 얼마나 이례적인지 짚어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매번 이례적인고 ‘역대급’이니까요. 그럼에도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이 일자리 통계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노동부 산하 노동통계국장을 경질한 일은 미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와 앞날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나를 음해하려고 통계를 조작해 온 통계국장은 바이든이 임명한 자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며 해고 사유를 밝혔습니다. 통계를 조작했다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트럼프가 해온 말이나 행동을 바탕으로 미뤄보면 제대로 된 근거가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르라는 왕의 명령에 모두가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을 진실로 둔갑해 부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정말 잘 어울리는 트럼프 행정부입니다.
이번 주에는 트럼프의 노동통계국장 해임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 짚어보려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지 혹은 불리한지에 따라 통계를 달리 대하는 태도가 정부의 공신력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트럼프의 이번 우발적인 경질은 앞으로 미국 정부가 발표하는 모든 공식적인 통계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는 일입니다. 노동통계국에서 발표하는 일자리 지표가 무엇인지, 왜 우선 예비 지표를 발표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 숫자를 조정하는지 그 이유도 살펴보겠습니다. 통계를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절차, 생리를 알아야 이번 발표가 진짜 조작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얘기는 오늘 말고 내일 뉴스레터에 쓸 생각입니다. 오늘은 노동통계국장 해고 소식을 접하면서 더 늦기 전에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름 가까이 미뤄둔 이야기인데요, 바로 지난달 미국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주제입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미국이 벌인 관세 협박과 협상 이야기가 주요 뉴스가 되면서 자연스레 잠시 덮였지만, 언제 또다시 분출될지 모르는 뇌관이 된, 바로 제프리 엡스틴 파일 이야기입니다.
미성년자 성매매, 성매매 알선, 성폭행, 성착취 등 각종 성범죄 혐의를 받고 복역 중에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엡스틴이 정·재계 거물 인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비호를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습니다. 음모론은 지금도 여전한데요, 바로 이 음모론을 앞장서 퍼뜨리고 그 덕에 지금의 자리에 이른 트럼프가 어떻게 음모론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몰락할 수도 있는지 그 연결고리를 이해해야 엡스틴 파일에 관한 논란을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엡스틴 파일에 관한 논란을 계속 시야에 담아두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엡스틴 파일을 보도하는 언론과 여론에 트럼프가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세간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공화국의 시민이 선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왕이라면, 엡스틴 파일은 왕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는,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일 수도 있는 겁니다.
엡스틴 파일은 ‘양치기 소년’ 트럼프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오늘은 우선 지록위마 정권의 역린으로 보이는 엡스틴 파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